월명동 개발의 추억들 운영자| 2009-01-20 |조회 7,221

     


    1992년 봄, 서울에서 집행부를 하고 있던 나는 선생님께서 월명동 개발을 하고 계셨기에 도움드릴 돈도 없고 해서 '이 몸으로라도 때우자' 라는 마음으로 집행부를 정리하고 월명동으로 내려 왔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섭리 10주년 행사를 치루기 위해 무대도 짜고, 지금의 돌조경이 생기기 전, 나무와 풀로 이루어진 앞산에 한 사람씩 앉을 수 있게 엉덩이 정도로 흙을 떠내고 그 위에 검불(마른 풀이나 작은 나뭇가지로 사람이 앉을 때 옷을 더럽히지 않게 쓰는 용도)이나 낙엽을 올려놓는 시범을 직접 보여 주시면서 그대로 2000개를 파라고 해서 하루 종일 판 기억이 있다. 앞산이 가파라서 회원들이 편하게 앉아서 행사를 볼 수 있도록 자연 스탠드를 만들어 주신 것이었다. 한참 삽질을 하면서 선생님의 제자들을 향한 마음을 체휼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역시 몸으로 해봐야 안다고 하신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참 끝도 없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온통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이곳을 장비라고는 삽과 곡괭이 리어카가 전부였다. 오아시스도 개발하고, 어머니 샘도 파고, 잔디도 더 심고, 산길도 내고, 풀도 치고, 가시나무도 제거하고, 나무심고, 거름 주고, 운동장도 맨날 복구 작업이고…….


    여름이면 앞산 앞으로 배수로가 대충 파였는데 한 번 비가 오면 왜 그렇게 억수 같이 쏟아지는지 금방 운동장이 떠내려 갈듯하고, 지금의 왼 쪽 돌 조경이 시작하는 부분 정도에는 물이 폭포 같이 내려가면서 앞산의 흙이 무너져 내리며 산사태가 날 지경이었다. 그 때 선생님은 순회 중이시라 안 계시고 정범석 목사님이 책임자로 계셨는데 남아 있던 남자들을 데리고 하루 종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앞산이 더 이상 붕괴되지 않도록 합판도 대고 기둥도 박아보고 큰 돌도 굴려 넣어보고 해서 간신히 물줄기를 약간 돌려놓을 수 있었다. 정말 중장비 없이 인력으로만 개발하던 때였다.


    월명동으로 큰 돌과 중장비가 들어오려면 제대로 된 길이 필요해졌다. 석막리 입구에서 콘크리트로 된 지금의 길을 만들기 위해 드디어 땅 주인들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 전에는 마을 앞으로 해서 말거리로 다녔는데 길이 좁아 주민들과의 불편함이 생기고 있었다. 작업반으로 함께 일하던 권순봉 목사가 나에게 포크레인 감독을 하라고 시켰다. 뭘 어떻게 감독을 하는지도 모르고 맡게 되었다. 공사판은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일 안하고 논다면서 한 사람이 붙어 있으며 음료수도 떠다주고, 밥시간 되면 알려주고, 지나가는 사람 사고 없이 안전 살펴주고 그러면 된다고 했다. 하여튼 감투를 썼으니 기분은 좋았다. 삽질, 낫질 하는 것 보다는 거대한 포크레인 앞에서 (길을 얼마나 어떻게 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왔다 갔다 하니 폼이 났다. 이 일을 하면서 정말 길 내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 쓰던 길인데 그 때는 꽤 넓은 길었다는데 워낙 안 쓰다 보니 밭주인들이 갉아 먹어서 길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길을 뚫어 갈려니 밭주인들이 한 뼘이라도 안 뺏길려고 싸우고 선생님과 정범석 목사님 그리고 마을 이장님 마을 어른들과 땅주인들의 밀고 댕기는 실갱이가 날마다 벌어졌다. 지금의 고바우 올라오기 전 왼쪽 편에 논이 있는데 주인이 농약을 먹고 죽겠다고 난리를 부려서 동네 사람들이 말리느라고 한 바탕 소란이 일어났었다. 이곳도 우여곡절 끝에 타협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길 중간 정도에 80에서 100톤 정도 되어 보이는 자연석 바위가 있었는데 땅 주인이 수호신처럼 모시던 그런 바위가 있어서 땅은 파는데 바위는 그대로 두라고 해 주인이 손도 못 대게 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석막리 앞산 쪽 응달 아래 집 한 채 있고 감나무 있는 다리 위 경사 올라가는 곳의 산 주인이 며칠 째 안 만나주고 이 핑계 저 핑계하며 땅을 안 내주려고 해서 진도가 안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잘 인도해주셨고 눈발 날리는 12월 크리스마스와 한 해를 길 뚫는데 보내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 새 포크레인 소리가 멈추었다.


    그때 작업 중에 위험했던 일이 생각이 난다. 석막리 맞은편 응달, 지금 산비탈 밑으로 집한 채 있고 감나무 있는 다리 쪽에서 죽을 뻔 한 일이 있었다. 그 때는 포크레인 감독에 상식이 없었던 때였다. 늦가을이라 해도 빨리 지는데 마치는 시간은 30분 정도를 앞두고 있었다. 동네 회관에서는 무슨 잔치를 하는지 시끌벅적하고 어둠 속에서 포크레인 불빛만이 보였는데 경사면 위에 포크레인이 있었고 나는 아래쪽에서 흙이 내려오는데 서 있었다. 전에 석막교회 지을 때 자갈을 날라 썼던 곳이다. 절대 중장비 보다 아래쪽에 있으면 안 되는 상식을 모르고 흙에 깔려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작업현장을 위로 쳐다보고 있는데 포크레인 기사는 내가 밑에 있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자갈들만 내려오다가 갑자기 내키만한 바위가 자갈과 함께 밀려 내려와서는 내 다리를 깔아 버렸다. 힘없이 쓰러지고 위에는 계속 자갈을 갔다 부어댄다. “스톱! 스톱! 밑에 사람 있어!” 하고 고함을 질러대고 “야~!” 하고 소리쳐도 포크레인 엔진소리에 묻히고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 예수님을 순간 외치며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경사가 있고 자갈이라 흐를 수도 있겠다.’ 싶어서 힘껏 옆으로 밀어보았다. 돌이 조금 움직이며 밑으로 흘러내렸다.


    한 쪽 다리가 빠져 나오니 다른 쪽 다리도 마저 빠져 나왔다. 간신히 살아서 나온 나는 이런 줄도 모르고 계속 작업만 하고 있는 기사가 너무 미웠고 마을 회관 앞 잔치에 음식 얻어먹으러 가서 떠들고 있는 작업자들이 미웠다. 나만 알고 하나님만 아는 일이라 그 누가 내가 돌과 흙에 깔려 죽을 뻔한 일을 알아주겠는가. 올라가서 포크레인 기사에게 창문을 두드리며 작업을 멈추라고 했다. 그제서야 기사가 멈추고 소리를 낮췄다. 내가 막 소리쳤다. ‘저 밑에 있다가 돌에 깔려 죽을 뻔 했는데 내가 고함쳐서 소리 질렀는데 못 들었냐.’고 하니 ‘거기 있었어요? 못 보았어요. 큰일날뻔 했네." 하고 간단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심각했는데 말이다.


    나는 그 때 생각했다. ‘되었다. 아! 이렇듯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분은 하나님이구나.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불렀을 때 하늘의 응답이 빠르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


    월명동 개발사에 정말 위험한 일들이 많았지만 너무 많기에 그것을 이곳에 다 기록을 할 수가 없다. 개개인의 일들을 모아보면 엄청 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생명을 지켜주셨다는 것이다. 오늘 밤은 왠지 그 때의 일들이 생각이 나서 기록해 본다.



      - 최태명 목사